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문단 편집) === 경제 정책 ===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에도 하술할 내용과 같이 파라과이의 국민 상당수는 스트로에스네르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실제로 일각에서는 스트로에스네르를 [[개발독재|개발독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스트로에스네르는 국제 대출 기관을 통해 국가 부채를 갚았으며 미국, 서독, 일본 등으로부터 차관을 받아 고속도로, 교량, 송유관 등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1971년부터 1984년까지는 세계 최대급 [[수력발전소]]인 [[이타이푸 댐]]과 아르헨티나 국경 인근에 있는 야시레타 댐(Yacyretá Dam)을 건설하는 등 파라과이의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을 취했고[* 물론 이타이푸 댐 건설 과정에서 최소 8만 명의 원주민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추방당하고 건설 과정에서 160명의 노동자가 죽는 등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 이 덕분에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파라과이의 경제성장률이 12%에 육박하는 등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후배인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비슷하게 국가의 경제는 어느 정도 성장했으나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거의 그대로였다. 특히 [[토지개혁]]을 한답시고 부자들의 땅을 몰수한 뒤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질 목적으로 지지자들에게 차별적으로 토지를 나눠준 일은 파라과이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삽질이다. 결국 상당수의 빈농들과 [[원주민]]들은 외딴 곳으로 쫓겨나거나 해외로 이주를 가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현재까지도 파라과이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겼다. 그의 독재 정치의 장점(?)이라면 정치적 불안정성에 의한 비용을 줄인 것이다. [[1927년]]부터 [[1954년]]까지 파라과이 대통령은 22명의 대통령이 집권했고 특히 1948년부터 1954년까지는 6명의 대통령이 집권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물론 스트로에스네르의 집권 이후 발생한 부패는 그 비용을 훨씬 능가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파라과이에는 정부, 콜로라도당, 무장세력에게 사업의 특혜가 집중적으로 분배되었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지에 무기, 마약, 위스키, 자동차 부품, 이국적인 동물들 등을 밀수출했는데 당시 파라과이의 밀수가 얼마나 심각했냐면 파라과이의 밀수량이 공식 수출액의 3배를 차지했다는 추산까지 있을 정도다. 거기에 많은 토지들이 소수의 기득권층들에게 집중되면서 파라과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는데 실제로 [[옥스팜]]과 [[앰네스티]]의 조사에 따르면 파라과이 인구의 1.6%가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전체 땅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경제학자 루이스 로하스(Luis Rojas)의 말에 따르면 파라과이에서는 단 2.5%의 토지 소유자가 농지의 최소 8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스트로에스네르는 2006년에 사망할 당시 기준으로 미화로 30억 달러를 남겼으며 [[파라나주]]의 과라투바에 방이 14개나 있는 여름 별장을[* 집권 당시에는 스트로에스네르의 휴양지로 쓰였다. [[https://s3.amazonaws.com/guaratuba.portaldacidade.com/img/news/editor/editor-6031b61158ac7.jpg|2021년 모습]]], [[미나스제라이스주]]에 농장을, [[리우데자네이루]]의 부촌인 바하다티주카에 부동산을 보유했고 경주마도 보유했다고 하며 그가 불법적으로 취급한 재산들은 맏아들 구스타보가 관리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